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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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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교우촌은 신유박해 이전인 1790년대부터 형성됐다. 1790년 북경 주교로부터 조상제사 금지령이 내린 뒤 천주교신자들은 향촌사회로부터 친척이나 가족의 사사로운 박해를 받음으로써 고향을 떠나 낯선 산간지방으로 숨어들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경상도지방의 교우촌은 비교적 박해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시작됐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알려진 황사영 『백서』의 내용을 보면 이미 경기, 충청, 전라도 세 곳과 경상, 강원도지방에서 신앙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유박해 이후 경상도지방에는 많은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많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비교적 박해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던 경상도지방의 산골로 숨어들어 살기 시작했고, 박해로 유배된 이들의 가족이나 친척들이 연고지를 버리고, 유배지로 함께 가서 살면서 그곳에 신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동네를 형성하게 됐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교우촌은 태백산, 소백산, 전주, 고산, 무장, 예천, 영광 등이다. 경상도에서는 진보의 머루산, 청송의 노래산이 대표적인 교우촌이다. 한편 신유박해로 인해 경상도지방으로 71명이 유배됐다.
신유박해 이후부터 을해박해가 일어나기 전까지 경상도 지방으로 많은 신자들이 이주해 교우촌을 형성했다. 을해박해가 일어났던 시기에 영호남지방에는 태백산, 소백산, 전주, 고산, 무장, 예천, 영광에 이어 울진, 청송, 진보, 상주, 영양, 안동 등에 교우촌이 있었다. 1827년의 정해박해 때 영남지역의 교우촌은 태백산, 소백산, 순흥, 봉화, 울진, 예천, 상주, 안동, 영양, 청송, 진보, 대구, 안의, 함안, 진주, 고성 등 16개 지역이다.
1849년 12월 말 귀국한 최양업 신부는 1861년 6월 15일 선종할 때까지 11년 6개월 동안 서양 선교사들이 순방할 수 없는 어려운 지역을 담당했다. 처음에는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이었으나, 나중에는 다블뤼 신부가 충청도 일부를, 1857년 페롱(Stamisalas Féron, 權, 1827-1903) 신부가 강원도지역과 경상도 북부지역을 담당하게 됐다. 당시 최양업 신부가 관할한 교우촌은 127개에 달하며 그의 편지에 기록된 것은 안곡, 죽림, 간월 등이다.

최양업 신부 선종 이후에는 리델 신부가 영호남지역의 사목을 담당했다. 특히 1861년 6월 10일 입국하여 1870년 6월 5일 제6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리델 주교가 제작한 지도에 의하면 1860년대 전국 153개 지역에 걸쳐 공소가 조성됐다.
박해를 피해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가 1868년 4월 27일 제6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됐다. 1877년 말 리델 주교가 두세(Eugéne Camille Doucet, 丁加彌, 1853-1917) 신부와 로베르 신부를 동행해 입국했으나 곧 체포돼 중국으로 추방됐다. 리델 주교가 조선에 돌아올 수 없게 되자 블랑(Jean Marie Gustave Blane, 白圭三, 1844-1890) 신부가 보좌주교로 임명됐다. 1880년 말 입국한 뮈텔 신부와 리우빌(Lucien Nicolas Anatole Liouville, 柳達榮, 1855-1898) 신부는 블랑 주교를 도와서 박해로 황폐해진 조선 교회의 재건을 서둘렀다. 선교사들의 노력에 힘입어 교우촌이 정착되고, 계속된 박해에도 공소는 1860년대보다 22개 지역이 더 늘어났다.

1878년 1월부터 황해도 지방에서 사목활동을 해오던 로베르 신부는 1881년에는 강원도에서, 1882년 초에는 경기도에서 선교하다가 1882년 말부터 경상도지방을 담당, 1883년부터 이 지역에 있는 공소를 방문했다. 로베르 신부는 1882-1883년 사목보고서(1883년 5월 2일 작성)에서 그의 사목 지역은 경상도와 충청도의 23개 지역 43개 공소이며, 그 관할 구역에 2천945명의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밝혔다. 로베르 신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1884년에는 그의 사목 지역에 1천772명의 고해성사자, 215명의 성인 영세자, 384명의 예비신자가 있었다. 리우빌 신부가 담당한 전라도 지역에는 1천776명의 고해성사자와 40여 명의 성인 영세자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