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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한국 천주교신자들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박해가 없는 경상도 지역으로 이주했다. 황사영 『백서』와 「사학 죄인 사영등 추안」,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와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서 말하는 황일광, 김종한 등의 기록을 통해 볼 때 신자들이 경상도로 이주했던 때는 1798년 전후이다. 그 후 경상도 지역의 신앙공동체는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하여 더욱 늘어났다.

1800년 순조純祖 즉위년에는 전국적으로 천주교 박해가 발생했다. 당시 조선의 국왕이었던 정조가 승하하고 나이 어린 순조가 등극하자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섭정이 시작되면서 천주교 박해가 심해졌다. 노론 벽파였던 정순왕후는 실권을 잡자 남인 시파를 탄압하려는 의도로 남인계 서학자 들을 구속했다. 서학을 금하는 포고가 발표되고,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 실시돼 천주교에 대한 수색이 엄격해졌다. 이 엄중한 감시 하에서 천주교 서적과 성물이 든 정약종의 서책함이 발각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남인 지도급 인사들이 모두 붙잡혔다. 정약종, 홍낙민, 최창현, 홍교만, 최필공, 이승훈, 강완숙 등은 참수당하고, 권철신 등은 옥사했으며, 정약용, 정약전 등은 경상도와 전라도로 각각 유배됐다. 이 박해는 지방으로까지 번져 이존창이 순교하고, 주문모 신부가 자수해 군문효수형을 당했다. 백서사건 이후에는 박해가 전국으로 확산돼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신유박해는 1801년 말 「토사교문討邪敎文」의 반포 이후 끝났으나 이 박해로 천주교신자 400여 명이 유배되고, 100여 명이 처형돼 초창기 한국 교회의 주요 인물들이 대부분 순교했다.

신유박해는 신자들의 지역 분포 양상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과거의 신자들은 서울, 경기, 충청, 전라지역에 집중되었으나, 이 박해로 인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됐다. 특히 신유박해가 영남지방에까지 미치지 않자 경상도지역이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안전지대로 인식됐고, 박해를 피해 경상도로 이주해 오는 신자들도 점차 증가됐다.
또한 신유박해 때문에 소위 사학죄인邪學罪人들이 전국 여러 지방으로 유배流配 또는 도배徒配됐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오히려 천주교를 전국적으로 알려주는 계기가 됐다. 1811년 작성된 『사학징의』에 의하면 신유박해 때 경상도 지방에 유배된 이들은 71명이다.
신유박해로 수많은 지도자와 신자들을 잃은 한국 교회는 이여진(요한, ?-1830), 신태보(申太甫베드로, 1768-1839), 권철신의 조카 권기인(요한), 홍낙민(洪樂敏 루가, 1740-1801)의 아들인 홍우송 등에 의한 교회 재건 운동이 시작되고, 성직자의 영입을 위해 1811년 말 이여진과 그 일행은 북경 주교와 교황에게 보내는 두 개의 서한을 가지고 북경에 갔다. 이 서한은 1814년 라틴어로 번역되어 교황에게 전해졌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과 중국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 때문에 북경 주교는 이들의 청원을 들어줄 수 없었다.

1814년 전국적으로 수해와 기근이 심각했으며, 특히 영남지방이 극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전지수라는 배교자가 신자들을 밀고하고, 그들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신자들의 재산을 노린 일부 백성의 탐욕과 중앙의 지시도 없이 지방관의 자의로 1815년 경상도 북부지방과 강원도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한 을해박해가 일어났다.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습격을 받은 곳은 청송의 노래산 교우촌이었다. 이곳에는 때마침 예수부활축일(음력 1815년 2월 22일)을 맞이해 각지에서 많은 교인들이 와 있었다. 이때 체포된 신자 고성운(高聖云 요셉, ?-1816), 고성대(高聖大 베드로, ?-1816), 구성열(具性悅 바르바라, ?-1816), 최봉한(崔奉漢 프란치스코, ?-1816), 서석봉(徐碩奉 안드레아, ?-1815), 김윤덕(金允德 아가타 막달레나, ?-1830), 안치룡(安致龍, ?-1815?) 등 40명이 경주 진영으로 압송됐다.

며칠 뒤 포졸들은 청송 진보 머루산 교우촌에서 김시우(金時佑 알렉시오, 1782-1815), 이시임(李時壬 안나, 1782-1816)과 그의 아들 박종악(1813-1816), 김흥금(金興金, 1765-1815), 김장복(金長福,1797-1815) 등 24명의 신자들을 체포해 안동진영으로 압송하고, 3월에는 일월산에 있던 영양의 곧은정을, 4월 23일에는 우련밭 교우촌을 급습하여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1816), 김희성(金稀成 프란치스코,1765-1816) 등 8명의 신자들을 체포해 안동진영으로 압송했다. 이리하여 경상북도 동북부지방 신자들 중 72명이 체포되고, 그 중 34명이 경상감영으로 이송됐다.

1815년 6월 18일 경상감사 이존수가 신문 결과를 조정에 보고했다. 최봉한, 김윤덕, 김악지(金岳只, ?-1815), 김진성(金振聲, ?-1815)은 이때 이미 옥사했으며, 나이 어린 김문악은 별도로 범한 바가 없으므로 석방하고, 나이가 많고 배교한 방만동과 어린아이 박종악을 제외한 나머지 27명에 대해 사형을 품신했다.
같은 해 7월 7일 조정에서는 배교하면 살려주고, 그렇지 않으면 사형하라는 회시를 보내어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이선복 등 11명이 배교했고, 신광채(申光采, ?-1815), 심경(沈瓊, ?-1815), 김광억(金光億, ?-1815), 박종악과 배교했던 방만동 등은 옥사했으며, 김종한, 김희성, 김시우, 김화춘(야고보, ?-1816), 고성대, 고성운, 이시임, 서석봉, 구성열, 안치룡, 김광복, 김흥금, 김장복 등 13명은 1815년 10월 18일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들이 감옥에 있는 동안 두 차례 더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사형 확정 판결 전에 안치룡, 서석봉, 김시우, 김흥금, 김장복, 김광복 등 6명이 옥사했다. 결국 1816년 10월 21일 김종한, 고성운, 고성대, 김희성, 김화춘, 구성열, 이시임 등 7명의 사형이 결정되고, 그해 11월 1일 경상감영의 사형장인 아미산 관덕당 형장에서 참수로 순교했다.
을해박해 이후 1816년경부터 조선 천주교회의 재건이 추진됐다.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1795-1839)이 성직자 영입을 위해 1822년경까지 9차례 북경을 왕래했다. 1821년경부터는 현석문(玄錫文 가를로, 1797-1846), 이경언(李景彦 바오로, 1790-1827) 등도 성직자 영입을 위해 함께 노력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자 1824년 말부터는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 1791-1839), 1826년경부터는 조신철(趙信喆 가를로, 1795-1839) 등이 참여했다. 1824년말에서 1825년 사이에 유진길 등이 교황에게 보낼 서한을 작성했다. 이 편지에는 성직자의 파견과 한국 교회를 위한 지속적인 대책을 강구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1827년 2월경 전라도 곡성 덕실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생기고, 천주교신자에 대한 밀고가 발생해 정해박해가 일어났다. 전라도에서 시작된 박해는 3월에는 주로 전라도 북부에 한정되다가 신자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다른 도의 신자들 이름도 드러나 박해가 다른지방으로까지 번졌다. 경상도에서는 그해 4월 22일 상주 잣골에 살고 있던 신태보가 체포돼 전주로 압송되고, 상주 멍에목에서 박경화(바오로, 1757-1827), 박사의(朴士儀 안드레아, 1792-1839) 부자, 상주 앵무동에서는 김사건(金士健 안드레아, 1794-1839)과 안군심(安君心 리카르도, 1774-1835), 봉화 곰직이에서는 이재행(李在行 안드레아, 1776-1839)이 체포되고, 5월에는 김세박(金世博 암브로시오, 1761-1828)이 안동진영에 나가 자수했다. 이외에도 여러 명이 더 붙잡혀 경상도에서는 31명의 신자가 체포됐다. 이들 중 25명은 나이가 어리거나 교리를 잘 모른다는 이유 등으로 풀려나거나 귀양을 가고, 신앙을 증거한 박경화 등 6명은 경상감영의 감옥에 갇혔다. 그 후 1827년 11월 15일 박경화, 12월 3일 김세박, 1835년에 안군심은 사형을 기다리다가 옥사했다. 박사의, 이재행, 김사건은 기해박해 때인 1839년 4월 14일(음) 대구 관덕당 형장에서 참수당했다.
정해박해 이전부터 시작된 조선 신자들의 청원과 북경 주교의 협력으로 1827년 교황청 포교성성은 파리외방전교회에 서한을 보내 조선 포교지를 맡아주도록 제의했다. 전교회의 사정으로 이 제의가 곧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브뤼기에르(Barthélemy Bruiguiére, 蘇, 1792-1835) 샴Siam대목구 부주교가 조선 선교사로 자원함으로써 새로운 활로를 열게 됐다.

조선에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창설된 지 46년 만인 1831년 9월 9일, 교황청은 조선을 교황 대목구代牧區로 설정했다. 동시에 브뤼기에르 주교를 조선 교황대목구의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 조선대목구를 북경 주교로부터 독립시켰다. 한국교회는 비로소 교황대목구라는 교계제도에 의해 지탱되고 확충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본국을 떠나 3년이 지난 뒤 만주로 갔지만 조선에 입국하지 못한 채 1835년 말 만주의 교우촌에서 선종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개척한 입국로를 통해 1836년 초 모방(Pierre Philbert Maubant, 1803-1939)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다. 이때 조선에는 그보다 1년 전에 입국해 있던 중국인 여항덕(余恒德 파치피코, 1795-1854) 신부가 있었다. 모방 신부는 입국한 지 1년 후인 1836년 말에 여항덕 신부를 중국으로 귀환시키고,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 최방제(崔方齊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838), 김대건(金大健 안드레아, 1821- 1846)등 세 소년을 마카오로 보내어 신학교육을 받게 했다. 이 때 이들을 국경까지 인도한 조선 신자들을 통해 샤스탕(Jacques Honor Chastan, 1803-1839) 신부가 입국했고, 1837년 말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Laurent Marie Joseph Imbert, 1797-1839) 주교도 의주 변문을 통해 조선에 입국했다.

1838년 초 조선에서는 프랑스 선교사 3명이 활약했다. 이들 선교사들은 전국 68개 지역에 걸쳐 확산된 신자들을 방문해 성사를 집행했으며, 회장이나 신자 대표를 선임함으로써 교회가 조직력을 갖추게 됐다. 그러나 그 동안 영입된 선교사들은 1839년 기해박해로 많은 신자들과 함께 순교했다. 당시의 기록인 『기해일기』에 따르면 전국에서 신자 54명이 참수당하고 60여 명이 옥사했다. 특히 이 시기에 1827년 정해박해 때 잡혀 사형 선고를 받고 12년 동안 수감 중이던 이재행, 박사의, 김사건 등 3명이 대구에서, 정태봉(鄭太奉 바오로, 1796-1839) 외 4명이 전주에서 각각 참수되어 순교했다. 전라도 고산 등지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체포돼 박춘하 외 20여 명이 처형되었다. 기해박해는 전국적인 박해였으며, 특히 경기도와 서울지역이 가장 심했다.

기해박해 이후 1845년 말,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Jean Joseph Ferréol, 1808-1853) 주교가 김대건 신부와 다블뤼 신부를 동행, 조선에 들어오면서 한국 교회는 부흥의 전기를 마련하게 됐다. 1846년 초 페레올 주교는 선교사들을 입국시키려고 해상로를 개척하기 위해 김대건 신부를 황해도 연안으로 파견했으나 그곳에서 뜻밖의 사고로 김대건 신부는 지방 관헌에게 체포되면서 병오박해가 일어났다. 병오박해는 김대건 신부와 관련된 신자들의 체포에 그쳤으므로 그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조선대목구 설정 이후 계속되는 박해 속에서 선교사들은 지방으로 피난하는 신자들이 교우촌을 형성, 신앙을 지탱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특히 철종의 천주교 관용정책으로 인하여 전국 각 지역의 공소가 이 시기에 많이 형성됐고, 한국 천주교회의 기반이 확고히 다져졌다.
기해박해 이후 뜸하던 천주교 박해가 1859년 12월 말부터 이듬해인 1860년 8월까지 경상도 지역에서 다시 일어났다. 이 박해는 새 좌우 포도대장 신명순, 임태영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 포도대장에 의한 박해가 조선 정부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했으며, 그들은 1860년 5월 10일 파면됐다. 이어 허계, 신관호가 새 좌우 포도대장으로 임명됐다. 이 포도대장들은 이 일을 소문 없이 가라앉히려고 했다. 그해 음력 8월 7일 철종의 명령으로 신자를 모두 풀어줌으로써 9개월 간의 경신박해는 끝났다. 이 박해 동안 최양업 신부는 간월골 죽림에 장기간 숨어있었다. 이곳에서 최양업 신부가 쓴 19번째 편지에 경신박해 때 경상도지방 신자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한편 언양에 살고 있던 허인백(許仁伯, 야고보, 1821-1868)도 포졸들에게 체포돼 50일 동안 언양 옥에 갇힌 채 문초를 받다가 경주진영으로 이송됐다. 이송된 그는 영장의 심문을 받고 곤장 20대를 맞았으며, 큰칼을 쓰고 8개월여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박해를 중단하라는 명에 의해 석방됐다.

충주 장원에서 대구로 이사와 살던 서태순(徐泰淳 베드로, 1823-1867)도 1860년에 잡혀 대구감영으로 끌려간 뒤 영장의 심문에 주뢰周牢와 주장朱杖, 곤장棍杖으로 무수히 맞아 팔과 다리가 끊어졌다. 그는 6개월 동안 옥중에 있으면서 배교하는 말을 하고 돈을 바쳐서 풀려났다. 또한 한티에서 1860년 2월 8일 이선이(엘리사벳, ?-1861)와 아들 배도령(스테파노, ?-1861)이 잡혀 현장에서 작두에 목이 잘려 순교했다고 전해지며 시신은 후에 신나무골에 안장되었다. 한티에 살고 있던 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전 바오로 형제는 난을 피해 달비골로 피신했다. 그 뒤 형 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건학 교우촌으로 옮겨 살았다.

최양업 신부는 경상도지방의 경신박해로 인하여 모든 외교인들이 천주교를 박멸하기 위해 무장하게 되었고, 천주교의 인기는 뚝 떨어졌으며,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한 이들은 냉담하게 됐다고 전한다.

박해 전에는 천주교에 대한 인기가 상승하여, 사방의 많은 외인들 중에서 예비신자들이 속출하였으므로 우리는 큰 위안을 받고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중략> 그러나 이번 박해로 인해 모든 외교인들이 천주교를 박멸하기 위해 무장하게 되었고, <중략> 천주교의 인기는 뚝 떨어졌고,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한 이들은 실망하며, 많은 이들이 적어도 겉으로는 냉담자로 보입니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도 경신박해로 인해 수많은 교우촌의 파괴, 교우들의 신앙에 대한 불안과 불신, 외인에 대한 복음 전파의 어려움 등을 전하고 있다. 이런 평가를 종합해보면 경신박해는 비록 좌우 포도대장이 국가의 승인 없이 일으킨 박해였지만 전교에 어려움을 주기에는 충분한 사건이었고, 경상도지방에 형성된 신앙공동의 구성원들에게 신앙에 어려움을 주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경신박해 이후 조선 교회가 다소 침체를 겪는 동안 1861년 3월 청나라 산동 지방을 떠난 배로, 1859년과 1860년 두 번에 걸쳐 입국하려다가 실패한 랑드르(Jean Marie Pierre Eliacin Landre, 洪, 1828- 1863) 신부, 조안노(Pierre Marie Joanno, 吳, 1832-1863) 신부, 리델(Félix Clair Ridel, 李明福, 1830-1884)신부, 깔레(Adolphe Nicolas Calais, 姜, 1833-1884) 신부 등 4명의 프랑스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왔다.

조선 교회가 경신박해를 극복하고, 2명의 주교와 7명의 프랑스 신부, 1명의 조선 신부를 모시고 새로운 발전을 기약하려 할 때인 1861년 6월 15일 최양업 신부가 장티푸스와 과로로 40세의 나이에 선종했다. 김대건 신부에 이어 조선 사람으로 두 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 신부는 12년 동안 전국을 누비며 가장 힘든 산골지역에서 헌신적으로 사목했고, 서양말로 된 교리책, 기도서 등을 틈틈이 우리말로 번역 출판했으며, 천주가사를 지어 교우들이 교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의 유해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가 있었던 제천 배론에 안장됐다.
철종을 왕위에 오르게 했던 김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1857년 8월 4일 70세로 사망했다. 철종의 장인 김문근마저 1863년 11월 사망하자 조 대왕대비 신정왕후神貞王后 세력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 달 뒤인 12월 8일 철종이 33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하자 후사가 없는 것을 기회로 조 대왕대비는 앞장서서 홍선군의 둘째 아들 이명복李明福을 왕위에 오르게 했다. 1863년 12월 13일, 제26대 왕으로 즉위한 고종은 그때 나이 12세였다. 당시 정치는 표면상으로는 조 대비가 하는 것 같았지만, 모든 실권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에게 있었다. 고종이 즉위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안동 김씨의 세력은 깨끗이 밀려났다. 그 대신 풍양 조씨 일파가 대궐 안에서 활개를 쳤다. 이들의 득세는 천주교의 앞날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전후 14년에 걸쳐 안동 김씨 세력 밑에서는 전국적인 천주교 박해가 거의 없었다. 전교 활동도 활성화됐다. 고종이 즉위하던 1863년 12월에는 베르뇌(Simon François Berneux, 張敬一, 1814-1866)주교를 포함해 8명의 성직자가 조선 교회에서 활동했으며, 신자는 2만3천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대원군 집권 10년은 천주교에 결정적인 철퇴가 내려진 시기였다. 대원군은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차지하고 남하정책을 계속 추진하자 베르뇌 주교의 교섭에 의해 프랑스의 도움으로 러시아 세력을 저지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866년 초 영불연합군이 북경을 함락했다는 소식을 들은 대원군은 베르뇌 주교가 그의 계획 실행에 협력하기 어렵게 되자 천주교신자 탄압을 결심, 선교사 체포령을 내렸다. 이 선교사 체포령으로 시작된 병인박해는 병인양요丙寅洋擾, 오페르트의 남연군南延君묘 도굴사건, 신미양요辛未洋擾를 거치면서 수많은 신자들이 처형되는 비극을 낳았으며, 1873년 대원군의 실각으로 종식됐다. 조선 천주교회는 1866년부터 1873년에 이르는 병인박해 기간 동안 사상 최대의 시련을 겪었다.

대원군 실각 이후, 천주교에 대한 직접적인 박해는 사라졌다. 천주교와 관련돼 치죄治罪된 전직 관리들도 복권됐다. 1874년 5월 20일 고종은 특명을 내려 천주교신자들에게 많은 돈을 대준 정언正言이었던 조철증(趙喆增, 1827-1868) 등의 죄를 사면했다. 고종의 이 결정에 대해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 의금부, 홍문관 등의 여러 관장들이 반대했다. 그러나 고종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않고 그들의 복권을 강력하게 명했다. 그러나 고종 집정 이후에도 외교조약이 맺어지는 1880년대 후반까지는 전국에서 사사로운 박해는 계속됐다. 신자들은 이후 30여 년 동안 박해자들과 대결하거나 피신해 살면서 믿음을 지켜야 했다.

병인년에 시작된 대박해를 거치면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전국적으로 8천여 명에 이르는 신자들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확인된 순교자는 경기도 74명, 충청도 336명, 황해도 25명, 전라도 33명, 경상도 43명, 함경도 18명, 평안도 1명, 강원도 1명 등이다.

또한 대구와 신나무골 신자들이 한티에 피신해 있다가 1868년 40여 명이 거기에서 순교했다. 한티에 살다가 순교한 이들은 대부분이 무명 순교자들이다. 조 가롤로와 그의 가족 정도가 이름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기록을 모아 간행한 『치명일기』에는 순교자 877명이 수록돼 있다.

이들 중 24위는 1968년에 복자품에 올랐고, 1984년 성인의 반열에 들게 됐다. 영호남지방에서 순교한 조윤호, 정원지, 한재권, 이명서, 손선지, 조화서, 정문호는 전주교구, 이윤일은 대구대교구의 제2주보성인으로 공경 받고 있다.

이윤일 성인은 충청도 홍주에서 출생하여 상주 갈골을 거쳐 문경 여우목에서 공소회장으로 활동했다. 1866년 11월 18일 문경관아에 체포되어 상주진영에서 문초를 받고,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1867년 1월 21일(양력) 관덕당 형장에서 52세의 나이로 참수 순교했다. 이윤일 성인은 1968년 10월 6일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인의 유해는 대구 날뫼에서 경기도 용인 묵리로, 다시 미리내성지로 이장되었다가 1986년 12월 21일 대구로 모셔졌다.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는 1987년 1월 21일 성인유해를 성모당에 안치하고 대구대교구 제2주보로 선포했다. 그후 1991년 1월 20일 성인의 유해는 관덕정순교기념관 성당에 봉안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