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로 수많은 지도자와 신자들을 잃은 한국 교회는 이여진(요한, ?-1830), 신태보(申太甫베드로, 1768-1839), 권철신의 조카 권기인(요한), 홍낙민(洪樂敏 루가, 1740-1801)의 아들인 홍우송 등에 의한 교회 재건 운동이 시작되고, 성직자의 영입을 위해 1811년 말 이여진과 그 일행은 북경 주교와 교황에게 보내는 두 개의 서한을 가지고 북경에 갔다. 이 서한은 1814년 라틴어로 번역되어 교황에게 전해졌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과 중국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 때문에 북경 주교는 이들의 청원을 들어줄 수 없었다.
1814년 전국적으로 수해와 기근이 심각했으며, 특히 영남지방이 극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전지수라는 배교자가 신자들을 밀고하고, 그들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신자들의 재산을 노린 일부 백성의 탐욕과 중앙의 지시도 없이 지방관의 자의로 1815년 경상도 북부지방과 강원도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한 을해박해가 일어났다.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습격을 받은 곳은 청송의 노래산 교우촌이었다. 이곳에는 때마침 예수부활축일(음력 1815년 2월 22일)을 맞이해 각지에서 많은 교인들이 와 있었다. 이때 체포된 신자 고성운(高聖云 요셉, ?-1816), 고성대(高聖大 베드로, ?-1816), 구성열(具性悅 바르바라, ?-1816), 최봉한(崔奉漢 프란치스코, ?-1816), 서석봉(徐碩奉 안드레아, ?-1815), 김윤덕(金允德 아가타 막달레나, ?-1830), 안치룡(安致龍, ?-1815?) 등 40명이 경주 진영으로 압송됐다.
며칠 뒤 포졸들은 청송 진보 머루산 교우촌에서 김시우(金時佑 알렉시오, 1782-1815), 이시임(李時壬 안나, 1782-1816)과 그의 아들 박종악(1813-1816), 김흥금(金興金, 1765-1815), 김장복(金長福,1797-1815) 등 24명의 신자들을 체포해 안동진영으로 압송하고, 3월에는 일월산에 있던 영양의 곧은정을, 4월 23일에는 우련밭 교우촌을 급습하여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1816), 김희성(金稀成 프란치스코,1765-1816) 등 8명의 신자들을 체포해 안동진영으로 압송했다. 이리하여 경상북도 동북부지방 신자들 중 72명이 체포되고, 그 중 34명이 경상감영으로 이송됐다.
1815년 6월 18일 경상감사 이존수가 신문 결과를 조정에 보고했다. 최봉한, 김윤덕, 김악지(金岳只, ?-1815), 김진성(金振聲, ?-1815)은 이때 이미 옥사했으며, 나이 어린 김문악은 별도로 범한 바가 없으므로 석방하고, 나이가 많고 배교한 방만동과 어린아이 박종악을 제외한 나머지 27명에 대해 사형을 품신했다.
같은 해 7월 7일 조정에서는 배교하면 살려주고, 그렇지 않으면 사형하라는 회시를 보내어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이선복 등 11명이 배교했고, 신광채(申光采, ?-1815), 심경(沈瓊, ?-1815), 김광억(金光億, ?-1815), 박종악과 배교했던 방만동 등은 옥사했으며, 김종한, 김희성, 김시우, 김화춘(야고보, ?-1816), 고성대, 고성운, 이시임, 서석봉, 구성열, 안치룡, 김광복, 김흥금, 김장복 등 13명은 1815년 10월 18일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들이 감옥에 있는 동안 두 차례 더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사형 확정 판결 전에 안치룡, 서석봉, 김시우, 김흥금, 김장복, 김광복 등 6명이 옥사했다. 결국 1816년 10월 21일 김종한, 고성운, 고성대, 김희성, 김화춘, 구성열, 이시임 등 7명의 사형이 결정되고, 그해 11월 1일 경상감영의 사형장인 아미산 관덕당 형장에서 참수로 순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