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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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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북쪽으로 24km쯤, 행정구역으로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에 자리한 한티는 서쪽 가산(901m)과 남동쪽 주봉인 팔공산(1,192m) 사이에 위치하며 가산에서 동쪽으로 7km 떨어진 깊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해발 600m를 넘는 이 심심산골은 천혜의 은둔지로서 박해를 피해 나온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한티에 언제부터 신자가 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을해박해와 정해박해 때 대구 감옥에 갇힌 신자 가족들이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이곳에 살았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매우 일찍부터 한티에는 신자들이 자리를 잡아 대구와 영남지방 교회의 터전이 돼 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1837년 서울에서 낙향하여 신나무골에 얼마간 살았던 김현상(요아킴) 가정이 기해박해 때 신나무골보다 더 깊은 산골인 한티에 와서 살았다. 이렇게 처음에는 한두 집 모여들어 움막을 짓고 사기와 숯을 굽고 화전을 일구어 생계를 유지하던 적은 수의 신자들이었으나 한티를 중심으로 인근의 서촌, 한밤, 원당 사람들이 입교하게 되면서 점차 커지기 시작하여 1850년대 큰 교우촌이 되었다.
경신박해가 시작되자 신나무골, 어골 뿐 아니라 한티도 안전한 곳이 못 되었다. 신나무골에서 한티 사기굴로 피신을 왔던 배손이 가족이 잡혀, 배손이는 배교하고, 아내 이선이와 장남 배 스테파노는 신앙을 증거한 후 작두날에 목이 잘려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그리하여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는데, 한티에 살던 김현상 가족들도 대구로 가고, 어골의 이재영(고스마, 이장언 회장의 부친) 가정도 대구 부근의 송골(중리동)로 피신했다. 그러나 몇 달 후 경신박해가 잠잠해지자 흩어졌던 신자들이 다시 모여들어 오히려 더 큰 규모로 성장하였다.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뒤 경상도 지역에 대하여 베르뇌 주교는 1862년 “칠곡 고을의 굉장히 큰 산 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는 40여 명이 성사를 받았습니다.”라고 성무집행보고서에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김현상 가정이 대구로 나감에 따라 상주 구두실이 고향인 조 가롤로 가정이 한티의 중심이 되었다. 신자들은 조 가롤로 집에 모여 주일을 지냈다. 경신박해 때 대구로 간 김현상 후손들은 대구 읍내 첫 신자 가정들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초창기 대구 교회 창설에 큰 공로를 세웠다.
이선이 엘리사벳(李先伊)은 칠곡에 사는 배손이(배정모)와 결혼하여 딸 하나와 아들 스테파노(본명 미상), 용철, 용덕을 낳았다. 그녀는 경신박해가 발발하기 전까지 남편을 따라 칠곡 골바실(국우동)에 살았고, 이 시기에 입교한 듯하다. 경신박해가 일어나자 관아가 있는 칠곡읍은 감시가 심했다. 그래서 박해를 피하여 신나무골로 이사를 갔다가 다시 여부재를 넘어 학명동(동명) 흑다리를 거쳐 팔공산 중턱 한티로 피난하였다. 당시 딸은 출가한 상태였다. 한티 사기굴에 피신해 있던 이들은 결국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포졸들이 심문을 하자 남편 배손이는 배교하였고, 이선이(42세)와 16세의 배도령은 “죽어도 성교를 믿겠다.”고 하였다. 포졸들이 웃옷을 벗겨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매질을 하였다. 혀가 빠질 정도로 매질을 하였음에도 이들은 신앙을 지켰다. 결국 포졸들은 작두날로 이들의 목을 잘랐다. 그 때를 1860년 2월 29일(음력 2월 8일)로 추정하고 있다. 용철(11살)과 용덕(4세)은 나이가 어린 탓에 심문을 당하지 않았다. 이선이와 배도령의 시신을 배손이가 한티 뒷산에 묻었다. 얼마 후 이선이의 시신은 칠곡읍 아양동 선산으로 이장하였다. 1984년 7월 7일 이선이의 유해를 신나무골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목이 잘려진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7월 8일 대구대교구장 서정길 대주교에 의해 이선이 묘지 이장식과 순교자 현양비 축성이 있었고, 그 때부터 그녀를 엘리사벳으로 불렀다. 또 그 묘의 위치를 정확히 찾지 못한 배도령은 스테파노라고 불렀다.
(1961년 이선이 엘리사벳가문의 후손 배태근의 구술 증언).
병인박해(1866)가 일어나자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있는 교우촌들은 유린되었고, 8천여 명 이상이 순교했다. 이러한 병인박해가 일어날 때 리텔 신부는 부활 판공을 주기 위해 대구에 와 있었다. 신부를 통해 박해 소식을 알게 된 대구 읍내와 신나무골 등에 있던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문경 한실과 한티로 피난을 갔다. 대구의 서상돈 집안이 이 시기에 한티로 이사를 했다. 대구의 김응진 가롤로 가정(김현상의 후손), 대구 부근 노곡동에 살던 송씨 가정을 비롯하여 신나무골의 많은 신자 가정이 한티로 피난했다. 병인박해 때 한티에 살던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오히려 대구 읍내로 피신했다. 1868년 시 외곽 동쪽 하양 방면으로 피신하였다가 대구로 돌아오던 중 고발하는 사람이 있어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감옥에서 자신을 고발한 이를 만났으며, 며칠 동안 문초를 받았지만 오히려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이때 감옥에서 서태순의 형인 서인순(시몬)을 만났으며,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좌포도청에 감금되어 있다가 교살형으로 순교했다. 그때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31세였다.
경신박해가 일어날 때 서태순은 대구지역(혹은 한티)에 살고 있었다. 서태순은 서치보徐致輔의 셋째아들로 1823년 충청도 청풍에서 태어났다. 기해박해 무렵 가족들과 함께 여우목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1840년 부친 서치보가 선종하게 되자, 17세 된 서태순은 어머니와 가족들은 풍기로 옮겨 살게 되었다. 이후 서태순은 풍기에서 김 데레사와 혼인한 후 충주 중원으로 이사했다. 박해가 소강상태에 이른 1859년 서태순의 가족과 형제들 가족은 한티에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러다가 경신박해가 일어나자 10월 13일경(음) 잡혔고, 경상감영의 감옥으로 끌려가 고문을 받고 심문을 받았다. 그러다가 결국 음력 12월 8-9일경 배교하고 돈을 바치고 나서 풀려나 몇 년을 냉담했다. 그 후 지난날의 잘못을 통회하고 열심을 회복하여 계명을 지켰고, 순교를 간절히 원하였다. 이 후 서태순의 가족들은 대구를 떠나 문경 한실의 교우촌으로 이사하였다. 서태순은 한실에서 체포되어 상주 감옥에서 교살로 순교하였다. 그의 시신은 조카 서상돈과 그의 가족들에 의해 한티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파헤친 사건이 발생한 이후 박해는 선참후계先斬後啓령이 시행될 정도로 전국적으로 격화되었다. 1868년경 봄 한티에 서울포졸과 가산산성을 지키던 군사들이 들이닥쳐 신자들을 체포했다. 배교하는 자는 놓아주었고, 공소회장 조 가롤로와 아내 최 바르바라와 동생 조아기 등 신앙을 지킨 자들은 그 자리에서 죽였으며, 도망가는 자들은 쫓아가서 죽였다. 이 때 순교자는 40여 명이었다. 포졸들과 병사들이 물러가고 난 뒤 살아남은 신자들이 한티에 돌아와 보니 동네는 불타 없어지고 온 산 곳곳에 시신이 썩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너무 많이 썩어서 옮길 수조차 없었으므로 그 자리에 매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돌 더미에 묻힌 이도 있고. 밭에 묻힌 이도 있고, 산등성이에 묻힌 이도 있다. 후에 발굴 작업을 통해 총 37기의 무덤이 있는 것이 확인 되었는데 한 무덤에 여러 명이 합장된 경우도 있다.
조 가롤로는 천주교를 박해하던 풍양 조씨인데 천주교를 믿는다고 박해를 받아 고향인 상주 구두실에서 쫓겨났다. 이로 아내 최바르바라와 동생 조아기와 함께 고향을 떠나 3년 동안 황간과 상촌 등지를 전전하다가 한티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숯을 구워 생활하면서 아들 영학과 영구를 낳고 살았다. 경신박해 때 김현상 요아킴 가정이 대구로 나감에 따라 조 가롤로가 공소회장이 되어 그의 집에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며 주일을 지켰다. 무진년 봄에 들이닥친 병사들의 칼에 조가롤로와 부인 최 바르바라와 그의 누이동생 조 아기는 목이 잘렸다. 영학과 영구 형제는 그 와중에 뒷산에 숨어 있다가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시신을 수습하였다. 그들의 시신은 사기굴 바로 앞에 있던 그들의 밭에 나란히 묻혔있다. 그리고 이들이 쓰던 묵주와 고상도 함께 묻었다고 한다.
병인박해 후에 한티에 신자들이 다시 모여 살았다. 조 가롤로 회장의 아들 조영학 토마, 살아남은 박만수 요셉, 군위에서 한티로 이사 온 김재윤 플로리아노, 김윤하 안드레아, 박기인 루도비코, 한돌철, 신나무골의 배순규 가정, 조규성 프란치스코 가정이 들어왔다. 이들을 중심으로 순교자들이 죽은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마을을 재건했다. 먼저 순교자들이 살던 마을(순교자묘역 대형 십자가 뒤편)은 “하느님을 증거하다 돌아가신 분들의 피가 서린 거룩한 곳이므로 우리 같은 죄인이 밟을 수 없다.”하여 바람맞이 땅(현재의 초가집이 있는 곳)에 새로이 마을을 이루었다. 또한 당시 공소회장이던 조 가롤로의 아들 조영학에게 집을 지어주고 공소 회장으로 추대했으며 이 후 그들은 순교자의 묘를 벌초하는 등 돌보고 관리했다.

1882-1883년 로베르 신부가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하면서 한티에서 성사를 집행했다. 이때 신자 39명, 고해성사자 20명, 영성체자 19명, 세례자 3명 혼배자 1쌍이었다. 1885년 대구 본당이 설정되어 로베르 신부가 신나무골에 정착하게 되어 로베르 신부도 한티에 자주 왔고, 한티 신자들은 대축일이면 신나무골로 미사 참례하러 갔다. 이후 한티공소는 새로이 번창하여 1900년 초에는 신자가 80여 명으로 늘어났으나 종교의 자유와 더불어 선교를 위해, 또한 생활이 불편한 이곳을 떠나 살기 좋은 곳으로 이주함으로써 공소는 쇠퇴하게 되었다.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정되기 전인 을해박해(1815)를 즈음하여 형성된 것으로 보는 한티교우촌의 역사는 오늘까지 200년의 세월이 지났다. 숱한 박해의 격랑 속에서도 조선대목구는 성장하여 80주년이 된 1911년,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로 분리 되었다. 대구대목구의 초대 안세화 드망즈 주교 때부터 현재 제10대 조환길 타대오 대주교에 이르기까지 대구대교구의 역사를 돌아볼 때 한티와 신나무골은 그 초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해박해가 발생되기 전 순회전교를 하였던 샤스탕 신부를 시작으로 최양업 신부, 다블뤼주교, 리델 신부 등이 경상도 지역을 맡았다. 김보록 신부는 1885년 대구지역 첫 본당으로 신나무골에 정착하기 그 전부터 한티를 방문하였고, 1895년에 가실본당이 설정이 된 후로 가실성당의 신부가 한티를 왔다. 대구대목구 설정 후 1927년부터는 비산본당의 관할이었다가, 한국전쟁이 끝난 1957년부터는 칠곡본당의 관할이 되었다. 1967년 9월 순교자성월부터는 대구대교구 액션단체 주관으로 공적 순례가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온다. 1980년대에 들어 본격적인 성지조성을 위한 부지매입과 순교자묘역확인 작업을 거친 후 1991년 피정의집이 개관되었고, 2000년에는 영성관이, 2004년에는 순례자성당이 축성되었다. 1995년부터 2015년까지 20년간 대구관구 신학생들이 한티로 입학하였으며, 지금도 사제품을 앞둔 신학생들의 30일 피정이 이어지고 있다. 피정의집 개관이래 30여 년 동안 매년 사제피정과 제 단체 피정 및 연수가 진행되고 있으며 해마다 전국의 순례자들은 물론 해외의 순례자들도 찾아와 영적인 힘을 얻어가고 있다. 박해시대 한티의 교우들이 신나무골을 오가며 걸었던 한티가는 길이 열림으로써 도보순례자들의 발길 또한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1) 한티는 순교자들이 살고 죽고 묻힌 곳이다.

전국에 많은 성지가 있으나 순교자들이 실제로 살고 그 자리에서 순교하고 그 자리에 묻힌 후 지금까지 무덤이 그대로 전해오는 성지는 잘 없다.
그런 면에서 한티는 특별한 성지라 할 수 있겠다.

2) 한티는 200년 동안 신앙의 숨결이 이어온 땅이기도 하다.

박해가 심하면 교우들이 떠남으로써 교우촌은 사라지게 되나,
​한티는 박해가 시작되거나 끝나고 나면 또 다시 교우들이 돌아와 지금까지 신앙의 숨결이 이어온 곳이다.

3) 한티는 박해시대의 심산 교우촌이다.

해발 600미터에 자리한 한티는 지금도 대중교통이 들어오지 않는 깊은 산중으로 주위에 다른 민가를 찾을 수 없는 외딴 곳이다.

4) 한티는 순교자와 교우촌이 함께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다.

순교자와 교우촌은 떼려야 뗄 수 없다. 교우촌은 순교자의 자궁과 같은 곳이다.
​한티는 교우촌을 중심으로 37기 순교자의 무덤이 십만여 평의 산에 병풍처럼 들러 싸여 있는 곳이다.

5) 한티는 박해시대의 이름 없는 순교자를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박해시대에 만 명이 넘는 순교자가 탄생했지만 대부분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런 무명 순교자의 삶을 느끼고 이해하고 배우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기도 하다.

6) 마지막으로 한티가는길은 자신을 돌아보고 비우고 뉘우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길을 배우는 곳이다.

지난 200년 동안 이 길을 오고 갔던 신앙 선조들이 하늘에서 이 길을 걷는 이들을 위해 빌어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