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 | 조선초기의 사기굴. 임진왜란 때 피난지 |
1801년 | 신유박해 - 서울 경기 충청 지방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남하하여 청송, 영양, 안동 등으로 피난 신자촌 형성 |
1815-1827년 | 을해박해와 정해박해 때에 대구감영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들이 감옥과 가깝고 안전하다고 판단한 한티에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 |
1838년 | 김현상 요아킴 가정 한티로 이주해 옴 |
1860년 |
경신 박해 - 직접적인 한티의 최초 박해 한티로 피난 왔던 이선이 엘리사벳과 아들 배스테파노 한티에서 순교 김현상 요아킴 가족 대구로 이주 |
1862년 | 40명 가량 성사를 받음(장 베르뇌 주교 보고서) |
1866년 | 병인박해 - 김응진 가롤로(김현상 차남) 가정, 서상돈 아오스딩 및 서인순 시몬, 노곡동 송씨 가족, 신나무골의 여러 신자들 한티로 피난 |
1867년 |
순교자 서태순 베드로 한티에 안장 서태순의 형 서인순 시몬과 이 알로이시오 대구로 내려가다 체포 서울로 압송, 좌포도청에서 참수 |
1868년 | 봄, 공소 회장 조가롤로 및 배교하지 않는 신자들 한티마을 현장에서 순교 |
1882-1883년 | 김보록 신부 한티에서 성사 집행(신자수 39명, 고백성사 20명, 영성체 19명, 세례 3명, 혼배 1쌍) |
1885년 |
대구 본당 설정(신나무골, 김보록 신부 - 한티 방문) 대축일에 신나무골로 미사참례 |
1900년 | 신자 수 80명 이상 |
1910년 | 한일합방 이후 일부 한티 교우들이 만주와 일본으로 떠남 |
1950년 | 한국전쟁 중 북한군과 치열한 접전 |
1967년 | 9월 순교자성월에 대구대교구 액션 단체 주관으로 순례 시작 |
1983년 |
매월 마지막 주일 순교자 현양 미사 봉헌 순교 성지 개발을 위한 부지 매입 및 조사 시작 |
1988년 5월 | 무명 순교자 묘 24기 확인(3기 이장, 합묘확인 2기) |
1990년 2월 | 한티 순교 성지 피정의 집 착공 |
1991년 9월 |
무명 순교자 묘 9기 추가 확인(유명 4기, 무명 33기) 한티 순교 성지 피정의 집 완공(9,29) |
1995년 3월 | 성지 안내소 완공 |
1997년 | 영성관 착공 |
2000년 |
대구대교구 대희년 전대사 순례성지로 지정 영성관 축성(2,17) 순교자 성월 지구별 한티순교성지 순례미사 봉헌 |
2004년 4월 13일 | 순례자의 집 기공 |
2004년 12월 10일 | 순례자의 집 축복 |